빙점

2015. 2. 17

2015년에 처음 읽은 장편 소설은 ‘빙점’과 ‘속 빙점’이다.

일단 ‘빙점’은 600쪽 넘는 분량을 하루 만에 다 읽을 정도로 재미있었다. 어릴 적에 어머니가 읽고 있던 모습이 기억에 남은 탓인지, 구식 로맨스 소설쯤으로 알고 있었는데 이렇게 재미있을 줄은 몰랐다.

주인공 쓰지구치 게이조와 그의 아내 나쓰에의 심리변화에 대한 묘사가 특히 흥미진진하다. 이렇게 솔직하면서도 역동적인 심리묘사는 별로 못 본 것 같다. 좋은 소설가들이 대부분 그렇듯이, 빙점을 쓴 미우라 아야코 상도 작중 진실을 드러낼 때는 인정사정없다. 잔인한 작가에 의해 발가벗겨지는 인물들의 너무도 인간적인, 그래서 사랑스럽기도 하고 추악하기도 한 모습들이 굉장히 매력적이다.

이야기의 동력 또한 강력하다. 3살 난 딸의 끔찍한 죽음이 남긴 어두운 그림자가 작품 전체에 드리워져 있고, 그 비극에서 비롯된 복수심과 욕망, 내적 갈등들이 엉망진창으로 뒤엉켜있다. 그 난장판의 중심에 있는 순진무구한 요코의 운명이 도무지 신뢰할 수 없는 두 주인공 게이조와 나쓰에의 변덕에 의해 언제든 파멸할 수 있다는 불안감이 이 소설의 가장 큰 매력이다.

빙점을 읽다보면 고대 그리스 비극이나 셰익스피어 작품들이 떠오르기도 한다. 물론 요즘 막장 드라마의 원형이라고 할만한 구석도 없진 않지만, 원래 비극은 모두 어느 정도는 막장이니까. 게다가 이야기 구조가 막장이라고 폄하하기에는 빙점은 너무 잘 쓴 소설이다. 특히 비극의 최정점에서 작품을 끝낸 건 최고의 선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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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속편은 왜 이렇게 후질까?
빙점이 대히트를 한 뒤, 5년의 시차를 두고 발표된 ‘속 빙점’은 기독교 교리에 매몰된 졸작이다. 전편의 긴장감은 거의 찾아볼 수 없고, 생생하던 등장인물들도 모두 정형화되고 말았다. 종교적 관점에서 해석한다면 흥미로운 부분이 있긴 하겠지만, 이야기 자체는 전편의 힘을 다 잃어버렸다. 200쪽쯤 읽었을 때부터 이미 읽기 싫어졌지만, 옛정(?)을 생각해서 꾹 참고 억지로 읽었다. 그러나 결론은 시간 낭비.

혹시 이 작품을 읽고 싶어진 분이 있다면 반드시 빙점만 읽으시라고 권해드리고 싶지만, 빙점의 결말을 보고도 속편을 찾지 않을 분은 없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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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 소설의 숨은 주인공은 배경인 홋카이도다. 읽는 중간에 여러 번 구글맵을 뒤적거리도 했는데, 언젠가 꼭 한번 가보고 싶어졌다. 물론 겨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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