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읽은 ‘청춘의 문장들’

2013. 8. 25

세 번째 완독이다. 에세이집을 세 번이나 읽은 건 무라카미 하루키의 ‘슬픈 외국어’와 이 책 ‘청춘의 문장들’뿐인 것 같다. 처음에는 도서관에서 빌려서 읽었고, 읽는 동안 너무나 마음에 들어서 사서 다시 읽었다. 그리고 이번에 왠지 문득 읽고 싶어져서 몇 주에 걸쳐 천천히 다시 한번 읽었다.

뭐가 그렇게 좋으냐고 묻는다면 딱히 대답할 말은 없다. 김연수 작가를 좋아하기는 하지만 두 번 이상 읽은 작품은 이 책이 유일하다. 이 책 자체도 아주 큰 감동이나 재미가 있는 책도 아니다. 소소하다면 소소한, 작가의 어릴 적, 지금보다 젊을 적 이야기들을 작가가 고른 좋은 글들과 엮어놓은 책일 뿐이다.

그런데 읽다 보면 그리운 무언가를 자극한다. 나도 궁금해서 그게 뭔지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아마 김연수 작가와 동년배인 사촌 형과의 추억인 듯싶다. 오랫동안 형과 한방을 쓰며 자란 덕분에 나는 20대인 형이 읽고 듣는 것들을 같이 즐기며 10대를 보냈는데, 이 책을 읽다 보면 형과 함께 한 시간들, 촌스럽고 그리운 1990년대 초반이 떠오른다. 형의 속마음을 읽는 것 같은 착각이 들기도 한다. 애틋한 기분이 든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매력은 문장이다. 난 김연수 작가의 문장을 참 좋아한다. 물론 다른 작품 속 문장들도 훌륭하지만, 이 책의 문장들은 특히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는 효과가 있는 것 같다. 정확히 설명하긴 힘들지만, 조용히 소리 내어 읽다 보면 문장이 마음속에 쌓이는 느낌이 든다. 그런 상태로 작업을 해보면 어쩐지 내가 쓴 문장들이 덜 못나 보이기도 한다.

이런 기쁨, 이런 행복을 주는 책은 바란다고 쉽게 만날 수 있는 게 아니다.

* 처음 읽었을 때도 감상을 어딘가 써둔 기억이 나긴 나는데, 블로그를 몇 번이나 옮기다보니 어디에 써놓았는지 찾을 수가 없네. 이거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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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은 – 빔 벤더스의 이야기 사진집

2013. 4. 13

영화감독 빔 벤더스의 사진집.

눈을 확 사로잡는 사진들은 아니지만, 사진 옆에 있는 “한번은..”이라고 시작하는 글과 함께 보면 묘하게 깊은 맛이 느껴진다. 이상하게 자꾸 손이 가는 책이다.

책의 앞부분은 유명한 영화인들과의 만남을 기록한 사진이 많은데, 이런저런 일화들이 꽤 재미있고, 장 뤽 고다르나 구로사와 아키라 등 선배 거장들에 대한 벤더스의 팬심은 조금은 뭉클하기까지 하다.

나머지는 대부분 여행하며 찍은 사진들이다. 사진만으로도 흥미롭지만, 사진에 얽힌 이야기와 생각들을 함께 보여주니까 사진이 훨씬 더 재미있고 풍성하게 느껴진다. 책을 읽는 내내, “아아, 좋다. 나도 이렇게 사진을 찍고, 이렇게 내 생각을 같이 남겨야지..”하는 생각을 몇 번이나 했는지 모른다.

참고로 표지의 저 털보는 마틴 스콜세지 아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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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미네 집 – 애틋한 딸 사랑의 기록

2013. 3. 31

아마추어 사진가의 그저그런 자비출판 사진집인 줄 알고 집어들었다가, 몇 번이나 콧등이 시큰해지는 감동을 받았다.

‘윤미네 집’은 사진이 취미인 대학교수가 큰딸 윤미가 태어난 1964년부터 결혼해서 미국으로 떠난 1989년까지 딸의 성장 과정을 찍은 사진들을 모아 만든 책이다. 1990년에 1,000부를 출간한 뒤 잊혀졌다가, 이 책의 진가를 알아본 사람들의 입소문을 타고 2010년에 재출간되었다고 한다.

윤미네 집 중에서

<윤미네 집>, 134쪽

아마 사진을 좋아하고 아이를 기르고 있는 부모라면 이 사진집을 좋아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사진 한 장 한 장마다 딸을 사랑하는 부모의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 있기 때문이다. 누구나 자기 자식을 사랑하지만 이렇게 사랑의 ‘흔적’을 남겨놓는 건 그 사랑을 더욱 애틋하게 만드는 것 같다.

아들 녀석들 때는 그런대로 덤덤했었는데 윤미를 시집보냈을 때는 그게 아니었다. 첫아이에 대한 남다른 감정도 감정이었지만 윤미는 결혼한 직후 신랑을 따라 멀리 미국으로 떠났기 때문이다. 김포공항에서 윤미를 보내고 집으로 돌아와 우리 부부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윤미의 방으로 올라갔다. 그러나 주인 없는 방에는 커튼만 방안 가득 펄럭이고 있었다. 그 허전함과 서운함이라니! 집사람은 돌아서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나 또한 뜨거운 그 무엇이 가슴 저 밑바닥에서 솟구쳐 올랐다. 그때부터인가. 나에게는 시간만 생기면 김포쪽 하늘을 멍하게 바라보는 좋지 않은 습성이 생겼다. 곧 윤미가 돌아올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그런데 그쪽 하늘에서는 웬 비행기가 그토록 수시로 뜨고 내리는지.
– <윤미네 집>, 17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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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시네마

2013. 3. 17

가족을 주제로 단편 4편을 묶은 옴니버스 영화. 유미리 원작의 장편 ‘가족시네마’와는 무관한 작품이다. KBS ‘독립영화관’으로 봤다.

순환선

‘레인보우’의 신수원 감독 작품. 정리해고 당한 중년 가장이 임신한 아내와 딸에게는 실직 사실을 숨기고 순환선을 타고 다니며 하루를 보내는 이야기다. 내가 정말 좋아하는 주제와 이야기인데 여기저기 조금씩 투박하고 노골적인 부분들이 약간 거슬리긴 했다. 그래도 많이 공감하며 재밌게 봤지만.

별 모양의 얼룩

딸을 잃은 엄마의 이야기. 내가 좋아하는 김지영 씨 주연작이다. 나도 딸을 키우는 입장이라서 그런지 4편 중 제일 몰입해서 봤다. 끝부분에 “내가 지워주지 못한 별 모양 얼룩”이라는 대사를 듣고 꺽꺽 울기까지 했다. 마지막 장면이 참 마음에 든다. 가슴 아픈 작품이지만, 다시 보고 싶다.

E.D. 571

사실 ‘별 모양의 얼룩’의 여운 떄문에 몰입이 안 됐다, 죄송하지만.

인 굿 컴퍼니

4편 중 가장 완성도 높은 작품이다.?엄마인 여성들의 노동 현실이라는 만만치 않은 주제를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게, 아주 재미있게 풀어냈다. 배우들 연기도 좋고, 이야기와 편집의 짜임새도 훌륭한 ?멋진 단편이다.?그리고 ‘미쓰 홍당무’ 이경미 감독의 단편 ‘잘돼가, 무엇이든?’에 나왔던 여직원 콤비도 참 반가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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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널 사랑하고 있어 – 유치하지만 예쁜 사진 영화

2013. 3. 5

유치뽕짝에 닭살이라고 투덜거리면서도 아내와 둘이서 꽤 재밌게 봤다.

일본 연애물 특유의 과장스럽게 귀여운 연기와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인물들이 약간 거슬리기는 한데, 오랜만에 보는 본격 연애물이라 그런지 오히려 신선한 느낌도 있다. 연애 영화라는 게 원래 그런 맛으로 보는 것이기도 하고.

‘다만, 너를 사랑하고 있어’라는 거지 같은 제목만 보고는 절대로 안 봤을 영화지만, 사진에 관한 내용이라는 소개글을 보고 일부러 찾아 봤다. 주인공 남녀의 취미가 사진이라서 이야기가 사진을 중심으로 진행되기도 하고, 사진을 찍는 장면, 사진이 등장하는 장면도 많다. 둘이서 사진기를 목에 걸고 다니며 사진을 찍고 남자 주인공의 집에서 현상하는 장면들을 보다보면 나도 당장 밖으로 나가서 사진을 찍고 싶어진다.

영화 자체도 사진적이다. 화면 구성이 예쁜 사진집을 연상시키는 장면들이 무척 많다. 이야기 자체는 그저그렇지만 눈은 확실히 즐거운 영화다. 사진이 취미인 사람이라면 더 재미있게 볼 만하고.

미야자키 아오이의 초딩 연기도 좋았다. 처음에는 너무 천진난만한 척하는 게 영 부담스러웠는데, 내용을 파악한 뒤에 보니 어린이를 표현한 세심한 표정 연기와 동작 등이 상당히 훌륭하다고 느껴졌다.

그나저나, 원작 소설의 제목이 ‘연애사진’이던데, 히로스에 료코 주연의 영화 ‘연애사진’하고는 무슨 관곌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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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룸 – 뉴스는 정치다

2013. 2. 15

The Newsroom

‘웨스트 윙’으로 유명한 애런 소킨이 각본을 쓰고 제작한 2012년 신작이다. ‘웨스트 윙’ 팬은 아니지만 다들 좋다고 하니 그런가 싶어서 봤는데 꽤 재미있게 봤다.

줄거리를 한 문장으로 요약하자면,
늘 기계적 중립을 지키던 인기 뉴스 앵커가 프로그램 PD가 옛 애인으로 교체된 것을 계기로 언론인으로서의 사명에 새로이 눈을 뜨고 공화당과 티파티 운동을 집중공격한다는 훈훈한 얘기다. (농담 같지만 진짜다.)

인기 드라마가 노골적으로 특정 정파의 입장을 대변한다는 게 놀라운데, 단순히 편을 드는 것도 아니고 구체적인 정치 현안들에 대해 본격적인 공격과 반론까지 펼친다. 우리나라에서는 절대로 불가능한 일일 테지만, 솔직히 부럽다기보다는 이렇게까지 해도 괜찮나 싶다. 충분한 대의를 갖고 있다면 뉴스든 드라마든 정치색을 띠는 것 자체는 상관없지만, ‘뉴스룸’의 경우는 생생한 현안들에 대해서도 너무 직접적이라 약간 부담스럽다. 난 심지어 이 드라마의 정치적 관점에 대충 동의하는데도 말이다.

시청자를 가르치려고 드는 태도도 조금 불편한데, 나 같은 외국인이 그렇게 생각할 정도면 미국 내 시청자들로부터도 볼멘소리가 나왔을 법하다. 그치만 언론이 민주주의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보는 계기가 된 것도 사실이다. 작가도 아예 작정하고 재밌게 가르치는 계몽 드라마를 만들려고 한 거 같고 그런 면에서는 분명 성공한 작품이다. 그래도 나라면 더 은근한 방식을 택했겠지만.

사실 소재가 뉴스와 정치라는 걸 제외하고는 그리 무거운 드라마는 아니다. 알콩달콩 삼각관계도 있고, 은근한 개그 요소도 많고, 다소 뻔하지만 흥미진진한 대립 구도도 있어서 제법 몰입해서 볼 만하다. 다만 등장인물들의 감정 전개가 좀 억지스럽다는 느낌은 있다. 요즘 미드들이 대개 그렇지만.

~

그건 그렇고, 엄청 지적이고 냉소적이고 카리스마 넘치는 주인공 윌 매커보이 아저씨,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이다 했더니 ‘덤 앤 더머’ 중 더머였네. 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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